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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행동의 근거에 대하여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글 2020. 8. 2. 14:59
쿠어트 바이어츠, <도대체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中
움베르토 에코·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무엇을 믿을 것인가> 中
우리는 특정한 행동들에 대하여 '나쁘다/비도덕적이다'라는 판단을 한다. 그 중에는 대다수 사람의 판단이 일치하며 행동의 조장/금지를 위한 강제력이 동원되는 경우가 있고('살인은 나쁘다', '집단괴롭힘은 나쁘다', '아동학대는 나쁘다' 등), 아직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쟁의 중심에 있거나 소수의 사람들 만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행동들이 있다(전자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나쁘다', 후자는 '식용동물에 대한 감금·폭행·살해는 나쁘다').
어느 경우에든, '나쁘다'는 판단의 공통적인 근거는 타자의 피해와 고통이 야기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타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왜 나쁜가? 우리는 왜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고, 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각자에게는 신앙, 신념, 욕구 등 행동에 대한 다양한 동기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특정하게 행동해야 하는/행동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어떤 근거로 납득시킬 수 있는가?
당위의 문제는 지난 5월 중순 DxE에 참여하면서부터 줄곧 품고 있던 질문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동물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가 동등하다'는 말을 확신하는가? 기존 사회질서와 도덕, 법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신념을 관철시켜나가는 이들에게 인간적으로 끌렸고, 그 신념의 뿌리를 나도 갖고 싶었다. 이들 앞에서 나는 어떤 것도 확신하지 않은 채로 지내는 것 같았고,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서 보이는 집념이 탐났다. 또 나의 자기확신을 넘어, 누군가가 나의 비거니즘을 문제시할 때 도리어 그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 헤맸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이들 개개인에게 행동의 이유를 물었고, 나와 같은 고민을 전개해나간 이들의 기록을 읽었다.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전 추기경은 그 중 한 명이었다.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어떤 윤리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해 <형이상학적인> 원리나 보편 타당한 <정언명령>에 기대려 하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 행동의 확실성과 당위성을 어디에서 구합니까?
- <무엇을 믿을 것인가> 103쪽
신앙은 도덕의 근거를 제시한다. 기독교인에게 인간이 존엄한 까닭을 물으면 그는 '모두가 자기보다 더 높고 더 위대한 어떤 것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이기 때문' 혹은 '신이 인간에게 영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서 출발하여 구체적인 행위 방식을 장려하고 지시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법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는 우리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어떤 종교에든 몸담을 수 있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어떠한 종교에도 몸담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 즉 신앙 없이 살아가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앙인은 비신앙인에게 자신의 신앙을 설파할 수 있으나 그것을 강제하거나 주입시킬 수 없다. 즉, 현대사회에서 신앙은 보편의 도덕이 되지 못한다.
움베르토 에코: 종교의 관점은 언제나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생활 방식을 제안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에 반해, 세속의 관점에서는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이고 그 선택이 다른 사람의 선택을 배척하는 것만 아니라면 어떤 생활 방식이든 최상의 것으로 간주합니다.
- <무엇을 믿을 것인가> 64쪽
마르티니는 책에서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못한다). 오히려 '고결한 비신앙인'들의 희생적인 행위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 근거의 불명확함이 주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고백한다. 세상엔 분명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에 선의의 힘을 확장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논리적 근거에 의한 행동이 아닐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라고 배워왔기 때문에(익숙해서)가 중대한 결단의 이유가 되는 일은 흔하다. 에코가 마르티니의 질문에 제시한 하나의 대답은 모두에게 통용될 수 없다. 허나 죄와 죄의식에 대해 '적절히' 교육받은 이에게는 매우 효과적인 대답이 될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 비신앙인은 아무도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에 자기의 죄를 용서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도 아비다. 만일 그가 악행을 저질렀다면, 그리고 그런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다면, 그의 고독은 무한할 것이고 그의 죽음은 절망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신앙인보다 더 과감하게 죄를 고백하면서 남들의 용서를 구하고 죄를 씻으려 할 것입니다.
- <무엇을 믿을 것인가> 127쪽
독일의 철학자 쿠어트 바이어츠도 같은 질문을 탐색하는 이이고, 그는 신앙 밖에서 답을 찾는다는 점에서 에코와 같지만 그보다 더욱 보수적이다. 도덕감정, 신앙, 개인의 이익 등 이제껏 도덕의 근거로 제시되어온 다양한 개념들을 훑으며 각각의 한계를 제시한다. 그는 400쪽에 달하는 책에서 결국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논증을 제시할 수 없음을 서문에서부터 밝히고 있다.
이러한 논증들은 전혀 예의바르지 않고, 그래서 도덕적일 근거가 없다고 믿는 사람을 <전향>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달리 말하자면, 이 책의 숙고들은 우리의 윤리 이론들이 미치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이해로 이끌 것이다.
- <도대체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16쪽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공통의 윤리적 기반을 마련할 수 없다면 우리는 폭력을 가하는 타자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주장할 수 있을까? 읽고 쓰고 이야기할수록 도덕의 발전은 실상 '진리의 확장'이라기보다 지속적인 권력투쟁과 협상의 결과물이라는 인상이 강해진다. 다행히, 바이어츠도 말하듯이, 이러한 인식은 체념이나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세상은 당위에 의해서(만) 변화해온 것이 아니며, 당위가 우리 행위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근거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p.s. 신념에 우열이 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자신이 가진 신념이 보편적으로 옳다고 믿지만 그것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 좌절하지 않도록 해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책에 제시된다. 도덕 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신념은 그 근간을 이루고, 신념에 반대되는 객관적 증거들 앞에서도 학자들은 신념을 수정하기를 자주 거부해왔다. 썩 기분 좋은 에피소드는 아니나, 적어도 조급해하지 않는 태도로 세상을 대할 수 있음(그리고 자주 그게 더 효과적임)을 가르쳐준다.
비록 우리가 여기서 이성적인 논변의 주관적인 한계 또는 사회적인 한계에 부딪쳤을지라도... 우리는 토론 상대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것을 우리의 논증들의 실패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갈릴레오가 자신을 반대하는 소요학파 학자들의 눈길을 망원경으로 돌리는데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논증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가 낡은 세계상에서 벗어나려는 능력이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 <도대체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365쪽
새로운 과학적인 진실은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방식으로 관철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멸종함으로써 관철되곤 하였다.
- 막스 플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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