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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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2 화, 사과의 시작이야기/상상이 적은 2019. 11. 12. 20:35
가해/피해 사실에 대한 공통의 이해, 그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 재발 방지, 피해자의 고통 경감 및 보상. 내 마음 편해지자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덜고 피해자가 바라는 방식으로 문제에 대해 조치를 취하는 것. 우리가 흔히 사과의 완성이라고 알고 있는, 아니 때로 사과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언어를 통한 미안함의 전달은 사과의 시작일 뿐이다. 특히 피해자의 고통이 지속되는 것이라면, 피해가 순간의 불쾌함이 아니라 마음에 돋아 오래 아프게 하는 바늘이 될 수 있다면, 언어를 통한 사과 이후의 일관된 행동과 끝까지 책임지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 고통 경감과 치유는 말을 듣는 데서 시작되더라도, 이후의 행동 속에서야 충분히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사과를 시작했다. 어떤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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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3 토이야기/상상이 적은 2019. 11. 3. 16:21
당신에게 더 이상 간접적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아두지 않는 지금, 여기에 내가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이 곳이 나의 온전한 글 공간이 된다면, 나를 아는 다른 이들도 이곳의 글들을 보기 시작하겠지. 지금처럼 당신만이 뒷문으로 슬쩍 들어와 당신에게 주려고 따로 빼놓은 일상 한 조각을 받아 다시 뒷문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활짝 열린 대문으로 누구든 들어와 나의 식탁을 둘러보게 되겠지. 세상과 연결되어있는 사람은 모두를 대하는 식탁에 차릴 음식이 넉넉하다. 나는 그러기에 늘 나의 재료와 그릇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지금도 그 자신감 부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나, 감사하게도 이 사회는 대학을 떠나는 이가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과 연결되도록 등을 떠민다. 그렇게 밀리고 움직여 내가 닿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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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1 금이야기/상상이 적은 2019. 10. 12. 02:08
나의 가해 사실을 덮어놓지 않기 위하여 내가 해야 하는 것들, 할 수 있는 것들. 나락의 감정이 지나간 뒤에, 사람들의 도움으로 얻은 깨달음. 가해 시의 대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하게도 피해자다. 가해 사실에 대한 정확한 사과,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 책임 있는 대처,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 사과.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한 사과. 대처의 시작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 어느 타이밍이 적절할지 모르겠어서 다음 주에 있을 상담에서 물어보려 한다. 책임 있는 대처. 피해자의 요구에 응할 것. 법적 문제가 있는 경우 법적 책임을 질 것. 재발 방지. 개인의 권리에 대한 학습. 젠더 문제에 대한 학습. 성폭력 가해자 교육은 존재하나,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만큼 흔하지는 않다. 인권센터에서 제공하는 교육 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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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5 토이야기/상상이 적은 2019. 10. 5. 03:05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과,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과, 사랑만 있으면 삶이 영원토록 밝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믿음이 한 번에 무너져 흔들리고 있다. 나는 적어도 늘 좋은 사람이 아니고, 가까운 이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지금도 내가 피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구원할 수 없을지 모른다. 내게 깊이 의지하던 친구가 최근에 감옥에 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지 모른다. 더 두려운 것은,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이 친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비참하다. 나는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오지 않았나.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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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9 목, 믿는다는 것이야기/상상이 적은 2019. 8. 30. 07:10
드디어 비웠다. 믿음의 바닥에 도달했다. 신을 통한 구원과 인간을 통한 구원, 그 무엇도 증명이나 반증명이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 인생과 인간에 대한 현인들의 가르침은 우리와 같은 곳에서 믿음을 쌓아 올려간 그들의 고백록. 결국 믿음은 (사회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든 그것은 사회의 물결을 벗어난 곳에서 형성될 수 없고, 따라서 물결을 온전히 파악한 채로 형성한 믿음일 가능성은 적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은 가능하므로- 물을 움직이는 조력을 바라보아야지. 문화의 역사는 곧 믿음의 역사. 무엇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즉, 무엇에 의미가 있다고 믿을 것인가. 사랑이 삶의 총체라던 나의 믿음은 그 정열을 잃었다. 경험이 믿음에 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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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5 목, 세상과의 연결이야기/상상이 적은 2019. 8. 16. 06:48
로마에서의 생활이 4/5 지점을 넘었다. 나에게 일을 주고 지도하는 두 사람 앞에서 그동안의 일을 전했다. 무가치한 인턴이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잔뜩 긴장한 채로 준비했는데, 긴장할 것 없다는 팀 리더의 말에 마음이 풀렸다. 나는 배우러 온 것이지, 역량을 검증받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많이 배우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에, 이미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할 나이라고 스스로를 보채던 내가 순간 고맙게 머쓱해졌다. 역량이 없으면 도태되는 구조 안에서의 만성적인 불안. (그 불안으로부터 떨어져 있기 위해 필사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우리들.) 구조를 바꾸지 못하리라는 무력감. 그리고 지나치게 비싼 자유의 냄새가 주는 우울. 먹고 마시고 싸는 것이 거의 보장되었으나 그 외의 무엇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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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7 토, 아이처럼이야기/상상이 적은 2019. 7. 28. 06:30
아이처럼 놀았다. 안지 한 달이 되지 않은 이와, 안지 세 달이 되었으나 이름 외에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없던 이와 함께 바다에 갔다. 우리는 아이처럼 파도를 맞고 놀았다. 구름이 날카로이 찌르는 해를 대신 맞아주어 적당히 서늘했다. 거리낌 없는 즐거움이 몇 남지 않은 당신과 나의 시간을 수놓고, 우리는 그 순간을 품은 채 아직 반이나 남은 각자의 하루 속으로 쏙-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아직 혀 위에 올리고 싶지 않은 말을 넣어두고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말은 서로를 향하지 않았던 말들, 그리고 모두를 향하는 말들. 그러나 P가 말했듯이, 모두를 향하는 말을 당신에게만 굳이 찾아가 입 밖에 내는 행위는 당신만을 향하는 말을 할 수 없는 이가 당신만을 향하는 마음을 담아 보내기 위한 일말의 노력이 될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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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4 수, 상실을 마주하여이야기/상상이 적은 2019. 7. 25. 04:55
곧 다시 만날 사람과 인사하고 집에 들어온다 곧 다시 만날 터이니 아쉬워하지 말라 말한다 그러나 곧 다시 만남은 나의 욕망이 아니다 나는 이 사람과, 이 사람들과 늘 함께하기를 바랐다 나의 것이 아니더라도 좋으니 그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기를 바랐다 첫 사람이 떠났을 때, 나는 아들을 안고 울었다 아들은 말없이 나의 머리를 감싸고 나는 첫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떠올리고 그러나 이제는, 그 누구도 떠올리지 않음이 가장 쉬운 길임을 알아버렸으니 문득, 뒤돌아본다 아쉬움은 시간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떨어짐이 아쉬운 만큼 다가가지 않았던 나의 시간들에 나는 너를 탓한다 흩날리는 재와 그 아래의 그리움을 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