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레이슨 페리, <남자는 불편해> 中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글 2020. 5. 10. 02:02
원제는 'The descent of man', 직역하면 남자의 내리막/남자의 하강. 특권적인 전통적 남성성이 가지는 '가치'가 현대사회의 기획에서는 거의 효용이 없고 오히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부적응적이기 때문에, 권위를 내려놓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 줄 아는 다원적 남성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책의 내용에 썩 어울리는 제목이다.
우리말 제목인 <남자는 불편해>는 여러모로 불편하다. 먼저 책의 내용과 요지를 포괄하지 못한다. 책은 권력, 연기, 폭력, 감정이라는 남성성의 네 가지 측면에 집중하면서, 남성성의 역사와 뿌리, 한계, 남성성의 미래를 두루 탐색한다. 불편함이라는 정서적 반응은 책의 일부분인 감정 파트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직역할 것이 아니었다면, 책의 넓은 관점을 포괄할 수 있는 거시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불편함'이라는 정서적 반응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남성성으로 불편을 겪는 것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둘 다인가? 이들이 느끼는 것은 불편함이 맞나? 책에서 주장하는 남성성의 문제는 불편함을 훌쩍 넘어선다. 남성들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여성들을 폭력과 억압과 정신적 외상의 피해자로 만든다. 어느 성별의 입장에서도 불편함은 남성성에 대한 정서적 반응의 핵심이 아니다. 굳이 남성성의 문제를 정서적 반응의 차원으로 한정지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할 것이라면 정서적 반응의 주체와 그에 적합한 정서적 반응을 담은 제목을 지어야 했다.
남자의 못 견디겠어? 남자는 무서워? 남자는 왜 그래? 남자는... 노답...
43, "객관성은 남성의 주관성이다". 남자들, 특히 디폴트 맨(백인이고, 중산층이며, 대개는 중년인 이성애자 남자)들은 자신의 편향되고 대단히 감정적인 시각들을 어떤 식으로든 합리적이고 더 깊이 숙고한 것으로, "자기야 진정해" 하고 말하는 식으로 내세워왔다... 전반적으로 남성은 여성에 비해 자신의 감정을 잘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 분노와 조롱과 적대감이 실린 자신의 세계관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정함이라고 착각한다.
*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다'. 반증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고리타분하고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는 수없이 깨져온 통념이다. 허나 개인 간의 관계 영역에서는 여전히 만연하다. 감정을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이 존중받지 못함에 대한 슬픔과 화와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그가 유난히 '감정적'이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거나 무시하지 않고, 감정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으로 무장한 남성의 '짜증'과 '화'는 감정적인 것이 아닌가? 오히려 정확한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여 농축되고 곪은 감정이 그렇게 지저분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간혹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 만큼 눈물이 차오르는 사람(대체로 여성)이나 화를 터뜨리는 사람(대체로 남성)을 본다. 나는 이것이 감정을 부차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남성성 중심 사회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감정 표현도 배워야 한다. 훈련해야 한다. 정확히 사랑하기 만큼, 정확히 감정 표현하기도 타고나기보다 기르는 것이다.
82, (영국인의 정체성 피라미드는) 처음에는 호모 사피엔스, 즉 사람이라는 데서 시작하는데 바로 다음 층을 성별이 차지하고 있다... 케이트는 내게 그걸 보여주면서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것에서 개인성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짚어주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개인'이라는 느낌보다는 내가 인간이며 특정한 사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과 훨씬 깊이 연관된다.
123, 우리가 입는 옷은 우리가 어떤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지를 알리는 시각적 언어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이 바라는 유형의 고나계들을 원활하게 해주는 쪽으로 외양을 가꾸는 데 투자한다... 남자처럼 보이고 싶다면 그런 남자처럼 옷을 입으라. 그러면 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당신을 그런 남자처럼 대하기 시작할 것이다. 남자의 존재 양상에 변화를 일으키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옷을 바꿔라. 그것이 그 변화의 길에서 핵심 역할을 할 것이다.
*저자는 크로스드레서다. 화려한 장식의 드레스를 즐겨 입고, 진한 화장을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으니' 한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개인주의와 다양성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기획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와 개인적 관계를 맺는다면 크로스드레싱의 동기를 좀 더 궁금해하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각본을 근거로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는 개인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저자 Grayson Perry. 화장하는 남자, 머리 기르는 남자, '여성스러운' 남자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크로스드레서이든 트랜스젠더 성소수자든 매일 겪는 차별이다. 저자 또한 예술가가 아니라 학교 선생이나 금융권 근로자나 공무원이었다면, 기성 조직에 몸담아야 했다면, 크로스드레서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평범함은 누군가에게는 평생 가지기 어려운, 혹은 쟁취해야 하는 꿈이다.
177, 소년들에게는 포털에 뜬 가십성 기사나 토크쇼에 나와 하는 말이 아니라, 직접 접하면서 멘토의 감수성으로 물들이고 일상적으로 자주 그 감수성을 강화해줄 수 있는 (적합한 현대 남성의) 롤모델이 필요하다.
237,
남자들이여, 차분히 앉아서 그대들의 권리를 주장하라
취약할 권리
약할 권리
틀릴 권리
직관적일 권리
모를 권리
불확실할 권리
유연할 권리
이 모두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을 권리
*좋은 어른이 필요하다. 차별하지 않는, 자신의 감정에 진실한, 사랑할 줄 아는 어른이. 이런 어른과 교감하며 자란 아이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소수자든 자기 자신으로 살며 타인을 그 사람 자체로 대할 것이다. 남성성의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 읽어보면 좋을 기사: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정치를 한다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김기홍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와 임푸른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의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5425
"성소수자가 불필요? 광고 감사히 받고 국회로 가겠습니다"
[우리의 사적인 정치 ③] 김기홍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임푸른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
www.ohmynews.com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덕적 행동의 근거에 대하여 (0) 2020.08.02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中 (0) 2020.05.04 토마스 페이지 맥비, <맨 얼라이브> 中 (0) 2020.04.26 허유선, <나는 너와의 연애를 후회한다> 中 (0) 2020.03.15 이소희 외,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中 (0) 2020.02.29